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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칼럼] ♥ 대박을 어디에서 찾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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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석춘 기자
기사입력 2021-01-14

 

 


요즘 많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자주 사용하는 단어중의 하나가 ‘대박~’이다. 대박이 무슨 뜻인지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뜻밖의 큰 횡재, 또는 큰 물건이나 어떠한 일이 크게 이루어졌을 때 감탄사처럼 사용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대박’의 유래는 두가지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 하나는 노름판에서 판돈을 ‘박’이라 불렀는데 패를 크게 잡고 큰 돈을 따면 ‘대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고,또 하나는 흥부가 제비다리를 치료해주고 그 보답으로 제비가 가져다 준, 박 씨앗을 심었더니 큰 박이 열려, 그 ‘대박’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대박’의 반대편에는‘쪽박’이 있다. ‘쪽’이라 함은 어떤 물건이쪼개져버린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니,‘쪽박’이란 쓸모 없이 버려진 쪼개진 박 그릇 조각이다. 욕심 많은 놀부가 대박을 노리고 흥부를 따라하다가 쫄딱 망한 것처럼 한마디로 횡재를 바랬는데 반대로 크게 망했다는 이야기다.

 

노름판에서 큰 돈을 따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거나,귀인을 만나 어느 날 갑자기 권세 있는 벼슬자리에 앉게 되는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확률 없는 대박을 꿈꾸고 거기에 올인 한 만큼, 이 땅에서의 삶을 쪽박인생으로 전락시킬 확률은 비례해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혹 기회가 주어져서 자기 인격의 용량보다 과분한 자리가 주어지거나, 감당할 수 없는 횡재를 얻고 난 이후, 그 권세와 그 재물로 인해 오히려 인생을 망치는사례들을 우리는 흔하게 목격하면서도 그 유혹에서 헤맨다. 저 죽는 줄도 모른 채, 쥐가 쥐약을 먹듯, 낚시에서 풀려난 물고기가 또 물었던 그 낚싯바늘을 다시 물 듯,  우리는 허망한 것에 도취되어 신기루 같은 그 지점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다.

 

카지노촌 술집에서 또는 경마장근처 지하철역에서 대박에 중독되어 폐인이 된 사람들의 초점 잃은 눈을 바라보라. 정상적인 사람의 눈이 아니다. 대박을 꿈꾸다 쪽박신세가 된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의 전형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목적 없는 ‘대박목표증후군’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 전체가 대박의 각축장이 되고, 목숨을 잃더라도 이기는 게 목표인 어리석은 싸움닭들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 아니 더냐?”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은 이미 세상을 자포자기한 한탄의 소리로 들려질 정도다.

 

그렇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가는 것일까?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원인은 무엇일까? 삶의 초점이 선한 목적보다 강한 수단(목표)에만 함몰 되어있기 때문이다.

 

목표는 목적을 향해 걸어가는 중간 발판이 요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 뗏목에 불과하다. 산꼭대기에서 인증샷 찍는 것이 등산 궁극의 목적이라면 굳이 힘들게 걸어갈 필요가 없다. 헬기나 케이블카 타고 바로 올라가면 된다. 만약 거룩해 보이는 직책이나 힘있는 권좌의 자리 자체가 성공의 최종 표상이라면 유토피아 세상 만드는 것은 간단하다. 전 국민을 성직자로 만들거나, 전 백성을 정치인으로 만들면 된다. 그러나 그 위치 그 자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쓰임 받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목표였던 그 자리는 성공의 상징이 아니라 역할의 대명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표지점에 다다른 환희는 한 순간이지만 목적을 품은 삶의 보람은 지속적이다. 

 

등산의 목적을 생각하면서 등반하는 사람은 준비하는 과정부터, 오르고 내려오는 모든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러길래 행여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지라도 진행된 만큼 과정이 행복할 수 있다. 정상에서 인증샷 안 찍었다고 슬퍼하며 이를 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만약 선(善)한 목적은 없고, 자기욕망을 위한 목표만 있다면, 종족보존의 욕구만 작동하는 동물세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욕망했던 목표지점이 성공의 끝이라고 규정한다면 세상은 언제나 지옥일 수밖에 없다. 자리는 한정 되어있고 탐하는 사람은 많기에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모두 경쟁의 대상이고 제거해야 할 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자리 마저도 영원할 수 없고 결국은 누군가에게 물려줘야만 한다. 그러길래 보이는 목표 그 위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는, 그동안 목숨 걸고 올인했던 그 자리는 결국 허무함과 괴로움의 도구만 될 뿐이다.

 

그러나 예컨대, “세상을 아름답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늘을 영화롭게~“와 같은나름대로 선(善)한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 자체를, 그시기와 크기에 관계없이 삶의 목적이요 보람이라고 여긴다면,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그들은 물리쳐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협력자요 동반자가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수단(목표)의 종류는다양하기 때문에 한 종류의 목표에만 경쟁적으로 올인하며 대박을 꿈꾸다가 쪽박을 차는 불행한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목표는 사라져도 사명은 영원하다.

☞보이는 목표는 경쟁이지만,보이지 않는 목적은 상생이다.

☞경쟁은 갈등이지만,상생은 화평이다.

 

 

윤영호 칼럼니스트(시인, 수필가,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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