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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군지(洪川郡誌)오류2] 역사를 지워버린 어용 역사학자 비난

강대덕 박사가 쓴 홍천군지는 모두 회수해 쓰레기통에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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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석춘 기자
기사입력 2021-01-14

강대덕 박사가 쓴 홍천군지는 모두 회수해 쓰레기통에 버려야

강대덕 박사 식민사관(植民史觀) 역사관 의심

홍천지명, 역사를 지워버린 어용 역사학자로 비난 잇따라

 

 

 


지명(地名)은 마을이나 산천, 지역 등의 이름이다. 그리고 유래(由來)는 그 지나온 내력들이다. 홍천의 읍·면·별 지명 유래는 수백, 수천 년간 그 마을이름에 관한 아름다운 내력이고 역사이다. 그런데 강 박사는 지난번 본지 12월2일자 기사 ‘홍천군지(洪川郡誌)오류1’ 에 밝혔듯이 상당한 오류와 함께 홍천의 역사를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기준을 둬 이전의 유구한 홍천역사를 묶어버렸다.

 

강 박사는 홍천군지편찬서 지명오류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만들어 놓은 행정구역에서만 지명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일제강점기 식민주의(植民主義)의 사관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특히 강 박사는 본인이 이미 조선시대 홍천읍지 등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홍천의 오랜 지명유래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홍천군지 지명유래 편에서 일제강점기의 기록만 인용했다. 정통사학자라면 일제강점기의 기록이 아닌 그전의 역사기록을 찾아서 군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의 시대적 역사적 사명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식민사관은 한국의 수천년 역사를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서가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역사관이다. 일제가 한국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역사학자로 자처하는 강 박사가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강조하기보다 일제가 만든 기준에 따르는 것은 무엇인가? 강 박사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무궁화의 상징인 남궁억 선생을 친일로 폄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그의 역사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강 박사가 집필한 홍천군지는 모두 회수해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그리고 집필진에 지출된 예산비용과 원고내역도 반드시 밝혀야 한다. 또한 원고도 쓰지 않은 자가 집필진 이름에 들어가 있고  또 강 박사와 함께 지명유래를 썼다는 부인 이건숙 씨는 전, 강원대학교 외래교수라고 했으나 사실을 확인한 결과 강대는 외래교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홍천군지(洪川郡誌)오류2] ‘홍천의 역사를 지워버린 홍천군지’

 

 

글을 쓰는 이는 필자고, 읽는 이는 독자다. 필자는 ‘머리 속 생각’을 글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독자는 글로서만 필자의 생각을 읽는다. 소설이나 시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을 적는 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기록물은 필자의 생각과 독자의 받아들임이 일치해야 한다. 곡해의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그게 기록물이다. 『홍천군지』는 기록물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올곧이 담아야 한다.

 

강 박사는 2018년 『홍천군지』 제2편 지명유래, 제3장 읍면별 지명유래 첫 마을로 진리를 소개했다.

‘(1) 진리(津里) 홍천읍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법정리이다. 본래 홍천군 홍천읍(현내면, 군내면)의 지역이었으며, 나루가 있었으므로 나루새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리(津里)라 하였으며 흔히 진삼거리라고 한다.’

 

독자는 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더더욱 홍천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 혹은 100년이 지난 후 홍천의 후인들이 2018년 『홍천군지』를 읽는다면 어떻게 해석할까? ‘진리. 이 지역의 이름은 나루새였다. 1914년에 진리(津里)라 하였다. 흔히 부르는 이름은 진삼거리다.’ 문자 그대로다. 다른 해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진리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새로 생긴 마을이 됐다. 2018년 『홍천군지』는 홍천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인 진리의 역사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진리는 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 첫 번째로 소개한 홍천의 첫 마을이다. 그런 만큼 진리는 홍천의 상징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津里 自官門南距一里. 編戶 四十八. 男 七十一口 女 五十五口. 진리. 관문으로부터 남쪽 1리에 있다. 가구 수는 48호. 남자가 71명이고 여자가 55명이다.’

 

홍천의 관문 진리는 『여지도서』 이후 발행되는 『홍천현읍지』, 『관동지』, 『홍천현 읍지. 백원정사 필사본』, 『관동읍지』, 『홍천현지』, 『홍천군읍지』, 『강원도지』에 모두 기록된 마을이 진리다. 그럼에도 2018년 『홍천군지』에서 유구한 역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소개하는 마을이 신장대리다.

 

‘(2) 신장대리(新場垈里) 홍천읍 중심부에 위치한 법정리로서 본래 홍천군 홍천읍(현내면)의 지역이었으며, 새로 전통 5일장이 섰으므로 새 장터 또는 신장대(新場垈)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터를 병합하여 신장대리라 하였으며 1985년 5월1일 3개 행정리로 분리되어 2018년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신장대리 역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장대리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1871년 『관동읍지』 방리 항목이다. ‘新場垈里 自官門南距三里. 신장대리 관문으로부터 남쪽 3리에 있다.’ 신장대리 역시 일제강점기 생긴 마을로 역사를 잘라버렸다.

 

∙희망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숲밭, 개때배기, 오리정을 병합하여 희망리라 하였다.

 

∙갈마곡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화양교 건너편 남산쪽의 짓골, 속개, 닥바우를 병합하여 갈마곡리라 하였다.

 

∙검율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뿌리, 음달말을 병합하여 검율리라 하였다.

 

∙와동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터, 와촌, 동막을 병합하여 와촌(瓦村)과 동막(東幕)의 이름을 따서 와동리라 하였다.

 

∙태학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기, 여냇골을 병합하여 태학리라 하여 홍천면(洪川面, 현 홍천읍)에 편입되었다.

 

∙연봉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배목기, 관텃골, 절골, 밤나뭇골을 병합하여 연봉리(連峰里)라 하였다.

 

∙하오안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시울, 굴골, 도새울, 둔지미, 오리나무정을 병합하여 하오안리라 하여 군내면(郡內面)에 편입되었다.

 

∙상오안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웃말〔상촌(上村)〕, 새술막〔신주막(新酒幕)〕, 공골〔공곡(貢谷)〕, 며느리고개말〔부치촌(婦峙村)〕, 청룡우(靑龍隅)를 병합하여 상오안리라 하였다.

 

∙장전평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갈골〔갈곡(葛谷)〕, 논골〔답곡(畓谷)〕, 먹실〔묵실(墨室), 묵곡(墨谷)〕, 안흥리(安興里), 지둔지(榛屯地)를 병합하여 장전평리라 하여 현내면(홍천읍)에 편입되었다.

 

∙삼마치리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너픈터, 독골, 솔골, 새말, 원터를 병합하여 삼마치리라 지명하고, 1962년에 홍천읍에 편입되었다.

 

홍천읍의 13개 모든 마을의 지명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버렸다. 비단 홍천읍만이 아니다. 2018 『홍천군지』에 소개된 1개읍 9개면 101개 마을지명 중 100개 마을 소개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가 웅크리고 앉아 마을의 역사를 난도질을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구가 없는 유일한 마을은 두촌면 괘석리다. 괘석리는 1914년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백 걸음을 양보해 1941년에 만든 『강원도지』에 처음으로 이름이 올라와 있는 와동리, 역내리, 광암리, 성수리는 그럴 수 있다 치자. 이를 제외한 96개 마을의 역사가 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를 기준으로 재단했는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강 박사의 역사관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홍천군지(洪川郡誌)오류3]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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